2편. 길을 잃어버린 별과 달의 나침반
1. 지도에 없던 길
소리 없는 종이 새로운 문장을 보여준 다음 날 밤이었습니다.
해솔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을 뒤편 산에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달이 산등성이 위로 올라오자 이상한 길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은빛 풀이 양옆으로 자라 있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해솔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저곳에는 원래 길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아둔 은색 종이 흔들렸습니다.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종 표면에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길 잃은 아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
해솔은 종과 작은 가방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쪽지를 남겼습니다.
‘잠깐 다녀올게요.’
밖으로 나오자 다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도 봤어?”
“저 길?”
다온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두 아이는 서로 바라보다 은빛 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2. 뒤돌아보면 사라지는 길
길 입구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다온이 표지판을 읽었습니다.
“왜 꼭 이런 곳에는 하지 말라는 게 있을까?”
해솔이 대답했습니다.
“그러게.”
두 아이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마을의 불빛이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걸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해솔아.”
할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해솔이 멈췄습니다.
“할아버지?”
다온이 급하게 해솔의 팔을 잡았습니다.
“뒤돌아보지 마.”
다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해솔아, 어디 가니?”
이번에는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해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주머니 속 은색 종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종 표면에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운 목소리가 모두 길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해솔은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3. 목적지를 잃어버린 숲
두 아이가 숲을 빠져나오자 넓은 들판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길이 있었습니다.
왼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가는 길.
하늘로 올라가는 길.
땅속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판에는 이상한 말만 적혀 있었습니다.
‘어딘가.’
‘아마도 이쪽.’
‘잘 모르겠음.’
‘돌아가는 길일지도 모름.’
다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찾아?”
그때였습니다.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작은 무언가가 걸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반딧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손바닥만 한 별이었습니다.
별에는 작은 두 다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별이 두 아이를 보더니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혹시 하늘이 어디인지 알아?”
다온이 위를 가리켰습니다.
“저기.”
별도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저기가… 하늘이야?”
해솔과 다온은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4. 자신의 자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별
작은 별의 이름은 루미였습니다.
적어도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해솔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땅까지 내려온 거야?”
루미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기억이 안 나.”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는?”
“그것도 몰라.”
“가족은?”
루미의 빛이 조금 어두워졌습니다.
“모르겠어.”
다온이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냥 위로 올라가면 되잖아.”
루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별은 아무 곳에나 있을 수 없어.”
“왜?”
“각자 자기 자리가 있거든.”
루미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자리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나.”
그 순간 해솔의 은색 종이 처음으로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딩.
그리고 들판 한가운데에 새로운 길이 나타났습니다.
길 끝에는 거대한 나침반 모양의 건물이 보였습니다.
5. 달의 나침반 가게
건물 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달의 나침반 가게 – 길을 잃은 것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세 아이가 문을 열었습니다.
안에는 수천 개의 나침반이 있었습니다.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나침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
다른 나침반에는,
‘잊어버린 약속.’
또 다른 나침반에는,
‘처음 시작한 곳.’
가장 작은 나침반에는,
‘집.’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서 오세요.”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의자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목에는 금빛 나침반을 달고 있었습니다.
다온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고양이가 말을 하네?”
고양이가 대답했습니다.
“별이 걸어 다니는 건 괜찮고?”
다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고양이는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나는 마루. 이곳의 길잡이야.”
6. 집을 가리키는 나침반
해솔은 루미를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아이가 자기 자리를 잃어버렸어요.”
마루는 루미 주변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흠.”
그리고 선반에서 작은 나침반을 꺼냈습니다.
표면에는 ‘집’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마루가 루미에게 건넸습니다.
“들어봐.”
루미가 나침반을 받았습니다.
바늘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열 바퀴.
아무 방향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루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이상하군.”
해솔이 물었습니다.
“고장 난 건가요?”
“이 가게에서 나침반이 고장 나는 일은 없어.”
“그럼 왜 이래요?”
마루가 루미를 바라보았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는 거야.”
루미의 작은 몸에서 빛이 꺼질 듯 흔들렸습니다.
7. 집은 태어난 곳일까
루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내가 떨어진 게 아닐지도 몰라.”
해솔이 물었습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내려온 걸지도 몰라.”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루미는 하늘에서 아주 작은 별이었습니다.
주변에는 크고 밝은 별들이 많았습니다.
루미는 아무리 빛나도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나는 저 별들처럼 밝지 않을까?”
그 생각은 매일 조금씩 커졌습니다.
어느 날 루미는 자신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더 잘 보이는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동하다 보니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하늘 아래까지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다온이 물었습니다.
“그럼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되잖아.”
루미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돌아가도 똑같을 것 같아.”
마루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집 나침반이 움직이지 않았던 거야.”
8. 나침반이 가리키지 못하는 곳
해솔은 마루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나침반은 없어요?”
마루는 가게 가장 높은 선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먼지가 쌓인 작은 상자가 있었습니다.
마루가 상자를 내려왔습니다.
안에는 바늘이 없는 나침반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온이 말했습니다.
“바늘이 없는데 어떻게 써?”
마루가 대답했습니다.
“이건 방향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야.”
“그럼요?”
“스스로 방향을 정했을 때만 바늘이 생기는 나침반.”
루미가 나침반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습니다.
마루가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해.”
루미는 한참 동안 눈을 감았습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갈까?
더 밝은 곳을 찾아갈까?
땅에 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9. 길을 모르는 것도 선택입니다
해솔이 루미 옆에 앉았습니다.
“꼭 지금 정해야 해?”
루미가 눈을 떴습니다.
“나침반을 움직여야 하잖아.”
“왜?”
“그래야 길을 찾으니까.”
해솔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길을 모르겠으면 조금 돌아다녀도 되잖아.”
루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돼?”
“안 된다고 누가 그랬는데?”
루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해솔은 웃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목적지가 있어야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요즘은 잘 모르겠어.”
해솔은 달빛 정원과 밤빛 염색소, 비밀 도서관, 소리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처음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출발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다 보면 찾는 것도 있는 것 같아.”
그 순간 루미가 들고 있던 나침반에서 작은 빛이 나타났습니다.
10. 처음 생겨난 새로운 방향
나침반 가운데에 바늘 하나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어느 길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바늘은 루미 자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루미가 당황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야?”
마루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방향이군.”
“어디를 가리키는 건데요?”
마루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정하는 곳.”
그 순간 들판의 수많은 길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루미의 발앞에서 새로운 길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길은 곧장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산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루미가 물었습니다.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어?”
마루가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몰라.”
“길잡이인데도?”
“모르는 길도 있어야 재미있지.”
11. 별은 꼭 하늘에 있어야 할까
루미는 당장 하늘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세상을 조금 여행해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정말 있고 싶은 곳을 찾으면 그때 돌아갈래.”
다온이 물었습니다.
“하늘이 아닐 수도 있어?”
“응.”
루미가 웃었습니다.
“별이라고 꼭 하늘에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 순간 루미의 몸에서 따뜻한 빛이 퍼졌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밝았습니다.
하지만 루미는 자신의 밝기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별과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 앞에 나타난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녀올게.”
루미는 새로운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조금 뒤 작은 별빛은 숲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12. 돌아가는 길과 나아가는 길
해솔과 다온도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루가 두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집 나침반이 필요하니?”
다온이 대답했습니다.
“네.”
해솔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 길 기억해요.”
마루가 웃었습니다.
“좋아.”
그러다 해솔에게 작은 나침반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래도 이건 가져가.”
나침반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습니다.
“이건 어디를 가리켜요?”
“아직 아무 데도.”
“그럼 왜 줘요?”
마루가 대답했습니다.
“언젠가 네가 길을 잃게 되면 알게 될 거야.”
해솔은 나침반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13. 길을 잃은 것은 별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새벽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잠들어 있었습니다.
해솔은 나침반을 책상 위에 놓았습니다.
그 순간 바늘이 움직였습니다.
철컥.
해솔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늘은 북쪽도,
남쪽도,
마루의 가게가 있던 방향도 아니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해솔은 창문으로 다가갔습니다.
마을에는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상했습니다.
골목길 하나가 사라져 있었습니다.
분명 어제까지 존재했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 끝에는 작은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순간 나침반 표면에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장소가 길을 잃었습니다.’
해솔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 순간 마을 여기저기에서 집들이 하나씩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빵집.
버스정류장.
학교 운동장.
그리고 해솔이 할아버지와 함께 달을 기다렸던 마당까지.
사람들이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장소들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해솔이 나침반을 움켜쥐었습니다.
멀리 달빛 아래에서 낯선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잊혀진 장소 보관소 →’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장소는 이곳으로 옮겨집니다.’
해솔은 사라져가는 마당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오래 기억하는 이유는 건물이 그곳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요.
그곳에서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해솔은 나침반과 은색 종을 챙겼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길을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지고 있는 장소들의 길을 찾아줘야 했습니다.
달이 천천히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 끝 –
dori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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