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밤의 색깔을 만드는 아이와 잃어버린 파란색
1. 어느 날 밤하늘이 회색이 되었습니다
달빛 정원에 별꽃이 피어난 지 며칠 뒤였습니다.
그날 밤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파란색이 사라진 것입니다.
평소라면 깊고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을 밤하늘이 오래된 종이처럼 희끄무레했습니다.
별은 떠 있었고 달도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은 어딘가 허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구름이 많아서 그런가 보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밤하늘의 파란색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이상하게 여긴 아이는 마을 끝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해솔이었습니다.
해솔은 밤을 좋아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밤에만 볼 수 있는 색깔들을 좋아했습니다.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란색도 있고 보라색도 있고 아주 조금 붉은색도 섞여 있다는 것을 해솔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리 바라봐도 회색뿐이었습니다.
“누가 밤의 색깔을 가져간 걸까?”
해솔은 혼잣말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툭.
지붕 위에서 무언가 떨어졌습니다.
해솔의 발밑에는 손가락만 한 작은 붓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2. 달빛 아래 나타난 파란 발자국
붓의 손잡이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밤빛 염색소.’
“염색소?”
해솔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붓끝에는 파란 물감이 아주 조금 묻어 있었습니다.
해솔이 손가락으로 만지려는 순간 붓이 혼자 움직였습니다.
슥—
마당 흙바닥에 파란 선 하나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슥.
슥.
선들은 작은 발자국처럼 이어졌습니다.
해솔은 고민했습니다.
밤늦게 혼자 밖으로 나가면 할아버지가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방문 앞에 메모를 남겼습니다.
‘잠깐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손전등을 챙겼습니다.
파란 발자국은 마을을 지나 숲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상하게도 손전등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발자국 자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숲속의 밤빛 염색소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해솔은 처음 보는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낮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던 자리였습니다.
굴뚝 세 개가 달린 작은 집.
창문에서는 파란빛과 보랏빛이 번갈아 새어나왔습니다.
문 위에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밤빛 염색소
해솔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습니다.
딸랑—
안에는 커다란 솥이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솥에는 별빛이 끓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에는 새벽 직전의 보랏빛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 번째 솥에서는 구름 그림자가 천천히 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밤하늘 파랑.’
“역시 여기였구나.”
해솔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붓을 어디서 찾았니?”
해솔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습니다.
작은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새하얗고 앞치마에는 수백 가지 색깔의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마당에 떨어져 있었어요.”
할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드디어 붓이 사람을 데려왔구나.”
4. 파란색은 물감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은 묘화였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밤하늘의 색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밤하늘도 누군가 색칠하는 거예요?”
해솔이 묻자 묘화가 웃었습니다.
“색칠한다기보다 매일 조금씩 물들이는 거란다.”
묘화는 빈 솥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파란색을 만들 수 없게 되었어.”
“파란 물감을 넣으면 되잖아요.”
해솔의 말에 묘화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밤의 파랑은 그런 색이 아니란다.”
묘화는 작은 병 세 개를 꺼냈습니다.
첫 번째 병에는 빗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병에는 누군가의 한숨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 번째 병에는 아주 조용한 웃음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밤의 색깔은 사람들의 하루에서 만들어져.”
“하루에서요?”
“그래. 낮 동안 사람들이 느꼈던 마음이 밤이 되면 아주 조금씩 하늘에 섞이거든.”
해솔은 빈 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럼 뭐가 부족한 거예요?”
묘화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기다림.”
5. 기다리지 않는 세상
묘화는 오래된 조리법 책을 펼쳤습니다.
밤하늘의 파랑을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녁을 기다리는 마음 한 숟가락.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두 방울.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 한 줌.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 조금.’
해솔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요?”
“요즘 그게 거의 들어오지 않는단다.”
묘화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화면을 보았습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도 화면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화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잠들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기다림 사이에 있던 작은 빈틈들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빈틈에서 만들어지던 밤의 파랑도 함께 줄어들었습니다.
해솔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럼 다시 기다리면 되잖아요.”
묘화가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지.”
6. 해솔의 열세 번째 밤
해솔은 빈 병 하나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묘화는 말했습니다.
“진짜 기다림을 발견하면 병이 알아서 담아줄 거야.”
다음 날 해솔은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빵집에도 가보았습니다.
빵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해솔은 며칠 동안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열세 번째 밤이 되었습니다.
해솔은 지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당에는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뭐 하고 계세요?”
“달 기다리지.”
“달이요?”
“구름 뒤에 있잖니.”
해솔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두꺼운 구름 때문에 달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지.”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휴대전화도 보지 않았습니다.
시계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해솔도 옆에 앉았습니다.
십 분이 지났습니다.
이십 분이 지났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 개 짖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였습니다.
한참 뒤 구름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왔구나.”
그 순간 해솔의 주머니가 환하게 빛났습니다.
7. 병에 담긴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해솔이 빈 병을 꺼냈습니다.
병 안에는 푸른빛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빛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할아버지의 숨소리.
그리고 달이 나타나기 전까지 함께 앉아 있었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해솔은 곧바로 밤빛 염색소로 달려갔습니다.
묘화는 병을 보자 환하게 웃었습니다.
“찾았구나.”
푸른빛을 빈 솥에 부었습니다.
촤아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솥 안에서 깊은 파란색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묘화가 커다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밤하늘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한 번.
회색 하늘 한쪽이 파랗게 변했습니다.
두 번.
산 위의 밤이 남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세 번.
마침내 온 세상의 밤이 다시 깊고 아름다운 색을 되찾았습니다.
8. 세상에서 가장 천천히 만들어지는 색
해솔은 묘화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계속 파란 밤을 볼 수 있는 거죠?”
묘화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오늘 만든 색도 언젠가는 다 쓰게 될 거야.”
“그럼 또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묘화는 처음 해솔의 마당에 떨어졌던 작은 붓을 건넸습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렴.”
“제가 밤을 색칠해야 해요?”
“아니.”
묘화가 웃었습니다.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면 돼.”
“그게 도움이 돼요?”
“세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꼭 필요한 시간이 있거든.”
그날 이후 해솔에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루에 딱 십 분.
휴대전화도 내려놓고,
책도 덮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십 분이 아주 길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솔은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
저녁마다 다른 색으로 변하는 하늘.
그리고 어느 날부터 해솔의 작은 붓 끝에는 아주 조금씩 파란빛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9. 달빛 정원에서 날아온 편지
어느 늦은 밤이었습니다.
해솔이 평소처럼 창가에 앉아 있을 때 창문 밖에서 작은 빛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반딧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작은 종이봉투였습니다.
봉투에는 별 모양의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해솔이 봉투를 열었습니다.
안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밤의 색을 되찾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 아래에는 처음 보는 주소가 있었습니다.
달빛 정원, 별꽃 아래 세 번째 화분.
해솔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달빛 정원?”
그 순간 편지 속에서 아주 작은 씨앗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씨앗은 새까맸습니다.
빛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솔이 손바닥에 올려놓자 작은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이름이 없는 색.’
해솔은 밤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별과 달 사이에는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수많은 색깔이 숨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색이 정말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해솔은 검은 씨앗을 작은 화분에 심었습니다.
창밖에서는 깊고 푸른 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자라날지 모르는 채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해솔은 이제 알고 있었으니까요.
기다리는 시간에도 무언가는 자라고 있다는 것을.
– 끝 –
dori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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